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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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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37대[3] 내지 제38대[4]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72년 11월 7일 ~ 11월 8일까지 실시된 선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가 압도적인 선거인단 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닉슨은 워싱턴 D.C.와 메사추세츠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 모두 이겼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결과의 선거가 12년 뒤에 재현되었으며[5] 미네소타주에서 공화당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대선이다.
2. 배경[편집]
68혁명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은 적극적으로 사회 안정 정책을 추진한다. 닉슨 대통령은 히피족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낙인찍으며 "히피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69년 로널드 레이건의 지시 하에 UC 버클리에서 농성하던 학생 시위대가 주방위군에 쓸려나갔고], 1970년에는 캄보디아 폭격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하는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해 1970년 동맹휴학 사태를 일으켰으나 정작 여론은 닉슨의 편이었다. 68혁명의 혼란에 질린 기성 세대가 오히려 대학생들의 항의에 대한 반발 심리로 닉슨을 지지해,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대학생들의 잘못이라는 의견이 여론조사에서 58%를 차지한 것이다. 1969년 5월 15일 레이건이 인민공원을 쓸어버렸을 때는 더해서, 레이건에게 보내진 103개의 전보 중 33대 1로 레이건의 편을 드는 사람이 많았을 지경이었다.[6] 여론에 힘을 입은 닉슨 대통령은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마약을 단속하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비록 현재로서는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이 대실패로 끝난 것으로 평가받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닉슨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대학생과 청년들은 닉슨의 권위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처사에 분노해 민주당과 반베트남 전쟁 시위로 결집했다. 1971년, 3개의 상이군인 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무공 훈장을 탄 베트남 전쟁의 참전 용사 존 케리가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주재 하에 이루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며 "미국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려는 목적만으로 청년의 목숨을 내다 버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으로 주춤해져있던 학생 운동권은 다시 불타올랐고 대학가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닉슨 사퇴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닉슨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민주당에서는 68혁명 이후 반전 시위대 지지 여부를 두고 당이 갈라져있었으며,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닉슨이 항상 인기가 높았던 것은 아니다. 1970년 1월에는 인플레이션이 6.1%로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경제 성장 역시 분명하게 둔화되고 있었다. 에드먼드 머스키는 "1920년대 공화당은 번영에서 실업으로 향하기까지 8년이 걸렸는데 이제는 1년 만에 하고 있다"며 행정부를 비판했고 폴 새뮤얼슨은 "닉슨 씨가 베트남에서 패배했다고 하고 손실을 줄인다면 시장이 50포인트 뛸 것이다"며 비꼬기까지 했다.[7] 상원에서 클레멘트 해인스워스와 G. 해럴드 카스웰 인준이 부결되기까지 하며 1971년의 닉슨은 꽤 취약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제가 아서 번즈 인준[9][10] 으로 회복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와 애그뉴의 폭발적인 수사법, 상술했던 청년 운동의 성장 등으로 인해 닉슨의 인기는 1971년의 저점에서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듯, 1972년 대선은 68혁명 이후 미국의 안정을 원하는 기성 세력과 변화를 원하는 청년 세력의 대결 구도 속에서 치러지게 된다. 한편, 닉슨 대통령에 의해 서명된 법으로 1972년 대선부터 선거 연령이 21세에서 18세로 하향되어 많은 청소년/대학생 신규 투표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3. 정당별 상황[편집]
3.1. 공화당[편집]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여론으로 단결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반대하던 공화당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닉슨 대통령의 좌익에서는 록펠러 공화당 중에서도 급진적 반전파를 대변했던 피트 매클로스키(Pete McCloskey)가 출마했고, 우익에서는 닉슨의 방중과 베트남 정책, 임금 및 물가 통제에 분노한 급진적 보수주의자 존 M. 애시브룩(John M. Ashbrook)이 출마했다. 매클로스키는 뉴햄프셔에서 반짝 19.8%를 찍었으나 거기까지.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경선 도전을 해서 성공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68혁명 시위대를 지지한 존 린지 뉴욕 시장은 아예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해버리기까지 했다. 결국 닉슨은 별다른 저항 없이 1972년 8월 23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1,347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11]
리처드 닉슨은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을 다시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싶지 않아했다. 애그뉴와는 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그뉴는 "닉슨의 닉슨"이라고 불리며 "유인원", "겁쟁이", "나봅" 등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내며 독립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래서 닉슨은 애그뉴 대신 자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존 코널리 재무장관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존 코널리는 당시 민주당원이었고 애그뉴의 전반적인 인기, 특히 공화당 내 강경파에서의 인기로 인해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자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애그뉴를 지명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애그뉴 역시 3표의 기권 및 반대를 제외하면 거의 만장일치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된다. [12]
3.2. 민주당[편집]
3.2.1. 분열과 난맥상[편집]
이 당시 후보들을 정리하자면 좌익에는 존 린지 뉴욕시장[17] ,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셜리 치좀 하원의원[18] ,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밴스 하트케 상원의원[19] , 프레드 해리스 상원의원[20] , 팻시 밍크 하원의원[21] 이 있었고 중도에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헨리 "스쿱" 잭슨 상원의원[22] 이 있었고 우익에는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 윌버 밀스 하원의원[23] , 샘 요티 LA 시장[24] 등이 있었다. 물론 프론트러너라고 할 만한 인물은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 그리고 경선에 대해 말을 아끼던 테드 케네디 정도였으나 하도 참가자가 많았기에 경선은 혼란 그 자체였다.
3.2.2. 에드먼드 머스키의 우세와 몰락[편집]
초기 우세를 잡은 것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험프리의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었다. 머스키가 출마한다면,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닉슨에 근소하게 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1월 24일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에드 머스키가 비록 후보 중에는 35.5%로 1등을 했으나 조지 맥거번같은 무명 상원의원이 22.6%를 기록하는 이변이 일어나 머스키의 우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Endorsement Ed"라는 별명까지 붙여질 정도의 프론트러너라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압도적인 재선을 원하고 있던 닉슨은 상대 후보에 대한 도감청, 언론 공작, 선거 캠프 분열 유도 등의 수작으로 머스키를 침몰시켰다. 머스키가 프랑스계 미국인 유권자들을 폄훼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는가 하면 부인이 담배를 피우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긴다며 영부인감이 아니라고 건드리는 비열한 공작도 서슴치 않았다.[25] 에드먼드 머스키는 격분해 네거티브에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이때 성명이 눈이 내리는 날 야외에서 진행되었는데, 눈이 얼굴에 닿아 녹아내린 것을 두고 닉슨 측 텔레비전 언론들은 "머스키가 감정적으로 대응해 울음을 터트렸다!"라고 거짓 보도를 했다. 유권자들은 이 말을 믿고 머스키를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감정적이고 조급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또 악재가 겹치고 마는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가 다가오는 와중 유권자들이 야밤중에도 걸려오는 "Harlem for Muskie Committee"의 전화에 격노하게 된 것이다.[26] 그렇게 다가온 3월 7일의 결과는 끔찍했다. 머스키가 이기긴 했으나, 당초의 예상이었던 65%와 다르게 단 46%의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머스키의 압도적인 선두주자 자리는 무너지고 말았다.[27]
3.2.3. 조지 맥거번의 부상[편집]
이 뉴햄프셔 대참사로 이득을 본 것은 조지 맥거번 팀이었다. 닉슨은 맥거번이 이기기 쉬운 만만한 호구라고 보고는 사보타지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맥거번의 지지가 오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의 플로리다 프라이머리는 개판 그 자체였다. 여기서도 닉슨의 공작원들이 머스키 지지자로 위장해 스쿱 잭슨이 고등학생 때 사생아를 낳았고 험프리는 음주운전하다 체포됐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린 것이다. 물론 머스키한테 공작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뉴햄프셔 대참사로 무너진 지지율이 있음에도 여전히 머스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닉슨의 공작원들은 플로리다의 보수성을 이용해 머스키가 버싱을 지지한다는 말을 널리 퍼트렸고, 민주당 거물들에게 머스키 팀인 것으로 위장해 "살찐 고양이"가 아닌 소액기부를 원한다는 편지까지 보낸 것이다. 1등은 말할 것 없이 남부파의 수장 조지 월리스가 42%를 차지한 것으로 끝났지만 머스키는 비참한 8.9%(...)를 얻으며 4등 자리를 얻게 되었다. [29] 일리노이 프라이머리도 있었으나 대의원들이 성별 규칙 안지켜서 싹다 쫓겨나버린 바람에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4월이 되서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에 더해 조지 맥거번까지 선두주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 프라이머리가 열린 주는 위스콘신이었는데, 맥거번은 이 순간을 위해 온 힘을 다해왔다. 중서부의 강철 벨트 주로서 이 곳은 험프리와 맥거번이 자연스럽게 우위를 점할 만한 주였다. 이 주를 이기는 것이 맥거번 팀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폭격 이슈가 프라이머리 직전에 떠오르며 위스콘신에서 맥거번이 승리하게 되었다. 휴버트 험프리에게 있어 이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당 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AFL-CIO의 완전한 지지를 받는 등 대규모 선거운동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자금 문제에서 가장 여유로운 인물이었다.[30] 게다가 위스콘신은 휴버트 험프리를 "세번째 상원의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사랑하던 주였다. 이런 주에서마저 풀뿌리 조직의 지지로 맥거번이 승리한 것이다. 심지어 월리스에게 밀린 3등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충격을 배로 만들었을 뿐이다. [31]
맥거번의 기세는 매사추세츠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어찌 보면 생전 로버트 F. 케네디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직접적인 후계자가 승리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매사추세츠에서 2등을 기록한 머스키는 맥거번과의 30% 격차에 좌절해 경선을 그만두게 되었다. 남은 민주당 존슨파의 희망 휴버트 험프리에게 위안이 된 사실은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승리였다. 조지 미니를 비롯한 AFL-CIO 등 노조 지도부는 험프리 하에 결집해있었다. 위스콘신은 온 힘을 쏟아부어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나 펜실베이니아에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경선은 험프리의 기득권 대 맥거번의 새정치, 그리고 월리스의 소수파로 정리되는 듯 했다.
3.2.4. 조지 월리스의 총격과 맥거번의 후보자 지명[편집]
그러나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월리스가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당한 것이다. 경선이 하루 남은 날에 일어난 암살미수는 경선을 뒤흔들어놓는 데 성공했다. 매릴랜드에서 월리스는 편안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시간의 결과였다. 미시간 주에서는 얼마 전에 내려진 버싱 판결로 인하여 인종적 분노가 고조된 상태였다. 거기에다 월리스의 총격으로 인한 동정표까지 더해져 표 과반수를 얻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월리스는 소수파였고 승리할 수는 없었다.
이제 프론트러너 험프리와 맥거번이 시선을 돌린 곳은 캘리포니아였다. 험프리는 캘리포니아를 이기지 못하면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압도적인 프론트러너가 돤 맥거번은 험프리보다 돈을 4배나 부어대며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험프리 대 맥거번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자신의 1000달러 기본소득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역전의 기회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프라이머리 날이 다가왔다. 다 끝났다. 맥거번은 5% 차로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271명의 대의원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경선도 싹쓸이하며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경선 결과, 총 득표수에서는 험프리가 불과 0.5%p차이로 맥거번을 제쳤으나, 대의원 수에서는 맥거번이 크게 앞섰다. 앞서 언급한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에 의해 통과된 슈퍼 대의원 제도에서 맥거번이 큰 수혜를 입은 까닭이었다. 험프리는 노동조합의 표심을 앞세운 "전격전"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여성이나 대학생, 청년 등 지역 풀뿌리 조직의 지지를 얻어내는 "진지전"에는 실패했고, 이것이 험프리의 실패를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소액 후원자들의 막강한 지지를 바탕으로 대의원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32]
3.2.5. 중앙당의 조지 맥거번 소외[편집]
문제는 이 제도 자체를 조지 맥거번이 이끄는 특별위원회가 도입해 셀프 수혜 의혹이 일어난데다(...) 맥거번의 정책이 상당히 좌파적이었기 때문에 휴버트 험프리가 경선에 불복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휴버트 험프리 진영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승자독식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민주당 전당대회 투표에서 맥거번의 지명을 막고자 했다. 캘리포니아에 배당된 대의원이 없다면 맥거번이 대의원 과반 득표에 실패하는데, 결선 투표에서 월리스, 잭슨, 머스키 등의 표를 흡수해 험프리가 과반 득표를 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서였다. 하지만 이 구상은 험프리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너무 비겁하다는 욕을 들었고[33] 위원회는 이미 맥거번파가 장악했기에 어림도 없어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지 맥거번은 당 내의 숟한 반발을 이겨내고, 1972년 7월 13일 마이애미에서 치러진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57%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민주당 당권파는 끝내 맥거번을 지지하지 않았다. 휴버트 험프리와 남부 민주당의 떠오르는 기수였던 지미 카터는 맥거번 지지를 거부했으며,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는 아예 "닉슨을 위한 민주당원" 운동을 주도한다. 물론 린든 B. 존슨[34] , 조지 월리스[35] 등 조지 맥거번을 지지한 소수의 인물도 있었으나, 이미 민주당 지지 노조인 AFL-CIO가 역대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를 거부하는 등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상태였다.
한편, 부통령 후보로 선출된 토머스 이글턴[36] 은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원의원이었으며, 민주당 내 우파에 속해 조지 맥거번의 부통령 후보자 리스트의 거의 끝에 있는 인물이었다. 본래 조지 맥거번은 자신의 친구이자 같은 파벌에 속했으며 인기도 좋은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꼽으려 했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는 상술한 "차파퀴딕 스캔들"로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이를 거부한다. 맥거번은 당의 통합을 위하여 상대 파벌의 수장인 휴버트 험프리에게 부통령 후보가 되어달라고 했지만 험프리는 매몰차게 거절했으며,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월터 먼데일도 유력 부통령 후보군이었으나 지명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거의 모든 부통령 후보군이 지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토머스 이글턴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도, 맥거번과 성향이 비슷하지도 않았음에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72년 전당대회는 1968년과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하는 노동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경찰이 출동해야했으며 전당대회장은 폭력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부통령 후보 지명 과정에서는 맥거번에 대한 항의 투표로 온갖 기상천외한 후보자들이 나왔고 투표지에 이름을 올린 후보자만 50명 가까이 되었다. 심지어 누군가 마오쩌둥을 적어서 낼 정도로(...) 상황은 엉망이었다.[37]
4. 최종 후보[편집]
4.1. 공화당: 리처드 닉슨[편집]
1972년 8월 13일, 마이애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리처드 닉슨은 총 1,348표 중 1,347표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스피로 애그뉴는 1,348표 중 1,345표 찬성, 1표 반대, 2표 기권으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Nixon Now, More than Ever!
바로 지금 닉슨, 그 어느때보다도!
1972년 닉슨-애그뉴 티켓 슬로건
리처드 닉슨은 자신이 재선된다면 더욱 안정된 미국을 만들 것이라고 공약하였다.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복지를 개혁하고, 환경을 보호할 것이며, 국외적으로는 데탕트를 완성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38] 전반적으로 닉슨은 1972년 대선을 앞두고 국내외 정책에서 좌클릭을 시도해 민주당 유권자들의 표까지 흡수하려고 했다.[39]
4.2. 민주당: 조지 맥거번[편집]
1972년 7월 13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지 맥거번은 총 3,014표 중 1,729표를 득표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 외에는 스쿱 잭슨이 525표, 조지 월리스가 382표, 셜리 치좀이 152표, 테리 샌포드가 78표 등을 득표하였다. 부통령 후보로는 토머스 이글턴이 1,742표를 얻어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Come Home, America!
미국, 집으로 돌아오세요!
1972 맥거번-이글턴 티켓 슬로건[40]
조지 맥거번 후보는 당시까지 선출된 미국의 모든 대통령 후보 중 가장 좌파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자신이 당선되면 모든 미국인들에게 연간 1,000달러의 기본소득을 제공할 것이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68혁명의 의제인 여성운동, 흑인 민권운동 등을 흡수했으며, 사회적으로 급진좌파의 성향을 보였다. 그는 평등권(ERA) 입법을 약속했고, 의료용 마리화나 비합법화, 베트남 전쟁 병역 기피자 즉각 사면, 낙태 합법화 등을 지지했다. 국외적으로는 미국의 평화주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으며 당선 90일 내에 베트남 전쟁에서 즉각 철수하겠다고 공약했다. 나토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나 지중해에서 단계적으로 병력을 철수해 주유럽 미군을 최소 규모로 축소하고, 주한미군은 아예 철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41]
조지 맥거번의 정책은 민주당 내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닉슨의 억압적인 사회 정책에 질려있던 청년층에게는 유례가 없는 지지를 받았다. 특히 연예계에서의 지지가 거셌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조지 맥거번을 공식적으로 지지했으며, 존 레논은 조지 맥거번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맥거번의 캠페인을 직접 돕기 위해 자선 콘서트까지 개최하려고 했다. 조니 미첼, 밥 딜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제퍼슨 에어플레인도 맥거번을 지지했다. 락 가수들의 연이은 맥거번 지지는 닉슨에게 경계의 대상이, 대학생들에게는 열광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락 가수들의 퇴폐적인 삶이 조명받고 있던[42] 당시로서, 락스타들의 맥거번 지지는 맥거번의 급진좌파 경향성을 기성 세대에게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43]
4.3. 기타 후보[편집]
- 존 G. 슈미츠(John G. Schmitz) - 미국 독립당
- 린다 제니스(Linda Jenness) - 사회주의노동자당[44]
- 벤저민 스폭(Benjamin Spock) - 인민당
- 루이스 피셔(Louis Fisher) - 미국 사회주의노동당[46]
- 존 G. 호스퍼스(John G. Hospers) - 자유당
- 거스 할(Gus Hall) - 미국 공산당
5. 선거 진행[편집]
5.1. 리처드 닉슨의 압도적인 우세[편집]
리처드 닉슨은 주로 기성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닉슨은 21세 이상의 모든 세대, 흑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 매사추세츠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 심지어 노동조합원들의 표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거의 모든 세대와 지역에서 밀렸으나 대학생과 청년 표에서만큼은 닉슨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맥거번 캠프의 자체 분석에 의하면 18~21세 구간 청소년 및 대학생들의 80% 이상이 맥거번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맥거번의 지지가 앞섰으므로 뉴욕, 일리노이, 위스콘신 등의 지역에서 맥거번이 근소하게 우세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닉슨이 거의 일방적으로 20%p 가까이 앞서나갔고 맥거번이 확실하게 앞설 것으로 예상된 지역은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치고 있던 매사추세츠 단 한 지역 뿐이었다.
조지 맥거번 선거 캠프의 전략가였던 게리 하트(Gary Hart)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선거 전략을 뒤집는 새로운 선거 전략을 내세웠다. 기존 민주당은 노동조합과 백인 서민층에게 어필하는 전략을 뉴딜연합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대학생과 청년, 다인종, 여성 등 닉슨 행정부에 의해 소외된 소수 그룹에게 다가가기로 한 것이다. 또한 존 레논, 밥 딜런 등 인지도가 있던 많은 락스타들이 닉슨을 비판하고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였으므로 이들의 영향을 받는 청소년과 히피 표가 조지 맥거번에게 모일 것이라고 예상되었다.[47] 이러한 게리 하트의 전략은 1972년 민주당 경선에서는 힘을 발휘했지만, 1972년 대선 본선에서는 중도소구력이 약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당의 성향 변화와 더불어 기존의 노동조합의 힘이 약해지자, 빌 클린턴은 이 전략을 대대적으로 차용하여 노동조합 대신 여성과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는 전략을 사용해 이후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게리 하트는 1974년 중간선거에서 콜로라도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1984년 대선에서 프론트러너로 활약하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48]
5.2. 맥거번 캠페인의 폭발[편집]
이에 대항해 리처드 닉슨은 상대방 진영을 도감청하는 것도 서슴치 않으며 맥거번의 캠페인을 침몰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나온 유명한 구호가 Amnesty, Abortion, Acid로, 조지 맥거번이 당선되면 즉각적으로 베트남전쟁 기피자 사면, 낙태 합법화, 마약 합법화[49] 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의 네거티브 구호였다. 더구나 조지 맥거번의 핵심 공약과 얼추 비슷한 것이었기에[51] 맥거번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박을 하지 않았고, 많은 락스타들과 연예인의 맥거번 지지 선언은 닉슨의 흑색선전을 일리있게 만들었다. 특히 북베트남을 방문해 베트콩 지지 선언을 한 제인 폰다가 맥거번을 지지하고, 북베트남 정부마저 "맥거번의 당선 여부를 살피며 협상에 임하겠다"라고 포고해 맥거번은 졸지에 친북베트남, 친마약 후보로 이미지가 씌워져버렸다. 당연히 미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중산층 투표 계층은 겁에 질려 닉슨 지지로 단결하였다. 이 구호는 닉슨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맥거번에 반대하던 민주당 보수파가 처음 만들었고 이를 닉슨이 차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놀랍게도 후속 연구에 따르면 이 구호를 처음 사용해 퍼트린 것은 맥거번의 러닝메이트였던 토머스 이글턴 상원의원이었다고 한다.
조지 맥거번은 이 논란이 말도 안되는 닉슨 측의 음해라고 주장하며 이글턴을 1,000 퍼센트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1,000%"라는 과장된 수치 때문에 오히려 대중들은 맥거번이 쩔쩔매며 사실을 은폐하는게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다. 결국, 일주일도 안가 이글턴은 후보직을 사퇴해버렸으며 맥거번은 수세에 몰렸다. 맥거번 캠프는 선거운동 중간이 부통령 후보를 바꾸는 초유의 상황에 내몰렸다. 맥거번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휴버트 험프리에게 러닝메이트가 되달라고 요청했지만 험프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에드먼드 머스키 역시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약체인 사전트 슈라이버 전 프랑스 대사[53] 가 맥거번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이 소란 이후 맥거번의 지지율은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떨어졌고 반대로 닉슨의 지지율은 60%대 중후반으로 올라가 양 후보간 지지율 격차가 35~40%p격차로 벌어지는 암담한 상황이 펼쳐진다.조지 맥거번은 토머스 이글턴을 1,000% 지지합니다.
조지 맥거번의 대변인이 낸 성명. 이 발언 6일 후 이글턴은 후보직을 사퇴한다.
맥거번 캠프는 자금 부족, 인력 부족, 전략가 부족의 3중고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미숙한 캠페인을 운영하게 된다. 한번은 30분짜리 정견 발표 광고를 냈는데, 하필이면 북미 최고의 인기 시리즈인 스타트렉의 방영 시간대에 광고를 방영하기로 해서 스타트렉 방영이 취소되고 대신 광고가 방영되는 참사(...)가 일어나, 격노한 스타트렉 팬들이 닉슨을 지지했다는 얘기도 있다. 또 휴버트 험프리 상원 의원과 함께 진행한 "시민과의 인터뷰"에서는 한 여성 닉슨 지지자가 맥거번을 집요하게 공격하자 참을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며 유권자를 다그치는 등[56] 온갖 실책과 실수가 반복되었다. 결정적으로 닉슨은 1968년 선거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약점인 TV 토론을 거부했다. 맥거번은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크게 여론조사에서 뒤쳐졌다.
5.3. 워터게이트 사건과 "명예로운 평화"[편집]
선거 막판, 맥거번의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민주당 지지층이 뒤늦게 결집해 맥거번의 지지율이 30%대 후반으로 상승하긴 했으나, 여전히 닉슨에 비해 30점 차이로 밀리는 불리한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조지 맥거번은 선거 방송을 보지도 않고 사우스다코타의 자택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으며, 모든 언론사는 일제리 닉슨의 초압승을 예상했다.
6. 선거 결과[편집]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닉슨의 초압승으로 나타났다. 최종 여론조사 결과와 거의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며, 닉슨은 매사추세츠주와 워싱턴 D.C.를 제외한 49개주에서 모두 승리했다. 심지어 조지 맥거번의 홈스테이트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승리했으며, 전통적인 민주당 우세주인 미네소타, 로드아일랜드, 뉴욕, 위스콘신에서도 모두 이겼다. 특히, 닉슨의 "남부전략"은 대성공했는데, 공화당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공화당이 남부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닌 압승이었다. 닉슨은 1968년 대선에서 39%를 얻는데 그친 텍사스 지역에서 무려 66%를 얻었으며, 조지아[58] ,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아칸소, 오클라호마에서는 모든 카운티에서 승리했고 특히 미시시피에서는 득표율이 1968년 13.5%에서 78.2%로 상승했다. 닉슨을 가장 많이 지지한 5개의 카운티가 모두 남부 주[59] 에서 나온 것은 닉슨의 남진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매사추세츠 주에서 케네디 가문의 지원으로 54.2%를 얻어 승리했을 뿐, 그 외의 주에서는 모조리 패배했으며, 로드아일랜드(46.8%), 미네소타(46.1%), 사우스다코타(45.5%)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닉슨에게 10점 이상의 차이로 패배하였다. 심지어 40% 이상을 득표한 지역도 12개 주 밖에 없었으며 30% 미만으로 득표한 주는 13곳이나 되었다. 미시시피에서는 아예 19.6%로 20%도 받지 못했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주에서 승리한 대선 후보가 되었다. 기존 기록은 대공황으로 지지율이 폭락한 공화당이 치룬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알프 랜던 후보가 기록한 2개 주였지만, 이를 경신한 것이다. 이후로도 이 기록은 단 한번의 타이 기록이 나왔을 뿐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닉슨은 전국투표에서 60.7%를 기록해 미국 역대 대통령 전국투표 기록 3위[60] 를 기록했고 기존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워런 G. 하딩이 세운 기록을 뛰어넘어 역대 공화당 대통령 후보 득표율 1위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기록 역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61]
세부적으로 닉슨은 역대 처음으로 블루칼라 투표에서 승리했고, 54% 대 46%로 가톨릭 투표에서도 처음 승리했으며, 48% 대 50%로 노동조합 투표에서 근소하게 맥거번에 뒤졌으나 이는 지금까지 공화당 후보가 노동조합원 사이에서 받은 최고의 성적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맥거번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것으로 예상된 청소년 투표에서도 46% 대 52%로 생각보다 매우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것으로 나타나, 닉슨이 강조한 "침묵하는 다수"이론이 대학생과 청년 사이에서도 먹혀들어갔음이 나타났다.
선거 결과에 조지 맥거번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배신감과 더불어 닉슨에 대한 증오감이 합쳐져 이민 드립을 칠 정도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다.[62] 맥거번은 선거방송을 보지 않고 사우스다코타 수폴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8시간동안 푹 잠을 잔 후 선거결과를 확인하고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직 수행을 응원하는 형식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선거 직후, 민주당 지도부는 전면적으로 재편되었으며 휴버트 험프리 휘하의 정치인들로 대부분이 채워진 새로운 지도부가 출범해 1976년 대선을 기약하게 된다.
반면 공화당과 닉슨 진영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닉슨은 자신이 1964년 존슨의 기록을 넘지 못한것과 케네디 가문의 심장인 매사추세츠 주를 탈환하지 못한 것에 매우 분개해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압도적인 선거 결과에 흡족해했으며 성실하게 국정을 계속 운영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였다.
6.1. 지역별 결과[편집]
7. 사건사고[편집]
이러한 기쁨도 잠시, 닉슨이 대선 당시 저지른 온갖 추잡한 짓들이 선거 이후 계속 드러나게 되었고, 이를 통칭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닉슨은 이로 인해 압도적인 대승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만에 대통령 직위에서 스스로 내려오게 되는 불명예를 떠안게 되었다.
7.1. 워터게이트 사건[편집]
1972~1974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정치 스캔들.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난 미국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또한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 사례의 하나다.
8. 여담[편집]
- 대체역사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 1972년 대선은 미국 정치가 전환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이 드라마에서는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달 착륙에 성공해,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NASA 청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차파퀴딕 별장 방문을 취소하며 현실과 달리 여비서 사망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64] 게다가 소련의 선제 달착륙으로 닉슨의 지지율이 어마어마하게 타격을 입어, 실제 역사와 달리 1972년 대선에서 테드 케네디가 리처드 닉슨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미국 정치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65]
「델라웨어」 주가 미국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을 선출하다
-지난 봄, 「J. 셀럽 보그스」 「델라웨어」주 연방 상원의원의 재선을 저지할 민주당 후보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일랜드 가톨릭 커뮤니티 밖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뉴캐슬 카운티 초선 의원 「조지프 R. 바이든 주니어」씨 만큼은 예외였다. 「바이든」씨는 델라웨어주 민주당의 지명을 받았고 유난히 에너지가 넘치는 선거운동으로 「델라웨어」주에서 자신을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어제, 그는 「보그스」상원의원이 하원의원, 주지사, 상원의원으로서 보낸 26년의 경력에 처음으로 낙선을 안겨주었다.
11월 20일이면 「바이든」씨는 30세가 되어 내년 1월에 개원할 연방 상원에 출석할 수 있는 연령대를 넘기게 된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러시 D. 홀트」의원은 1934년 당선되었을 때 「바이든」씨보다 6개월 더 어렸지만 자격을 갖추고 선서를 한 것은 그 다음해 6월이었으므로 「바이든」씨는 역대 최연소 상원의원이 된다.
「보그스」씨의 예상치 못한 낙선을 막기 위해 「스피로 애그뉴」부통령은 그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려 「델라웨어」주에 상주하던 참이었다. 「닉슨」 대통령도 널리 배포된 브로셔 사진에서 그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미국은 다음 의회에서 당신의 리더십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적인 친필 성명을 냈다. 그럼에도 「조지프 바이든」씨가 11만 6,000표 대 11만 3,000표로 승리하였다.
「델라웨어」주에서 「닉슨」 대통령은 「맥거번」씨를 크게 앞질렀지만 주 정계에서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 정치인들의 운명은 달랐다. 재선을 노리는 「러셀 W. 피터슨」 주지사는 「셜리 W. 트리비트」 하원의원에게 7,000여표 차이로 패배했고, 「윌밍턴」시의 시장 「해리 G. 헤이스컬 주니어」씨는 시의원 「토머스 C. 멀로니」씨에게 4,000표 차이로 패배했다. 다만, 하원의원에서는 「피에르 S. 뒤퐁 4세」 의원이 민주당 도전자인 「노마 B. 플랜들로프」 「뉴어크」 전 시장을 14만 1,000표 대 8만 3,000표로 앞서 체면을 지켰다.
키가 크고 구릿빛 얼굴로 유명한 유능한 지역 변호사 「조지프 바이든」씨는 「보그스」 상원의원보다 더욱 사회비판적인 상원의원이 「워싱턴」에 입성해야한다는 취지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빠른 종식, 습지 보존을 위한 보호 법안, 보다 『공평』한 조세 제도, 정부의 도덕성 및 독립적인 소비자 보호 기관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되었다.
그는 깔끔한 선거운동을 벌였고 주말마다 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달려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2,000명의 젊은 자원 봉사자 조직을 구성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유권자들에게 확신시켰다. 「바이든」씨의 정열적인 선거운동은 출마를 꺼렸지만 「닉슨」 대통령의 강권으로 출마한 63세의 상원의원의 선거운동과는 명백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바이든」씨의 젊디 젊은 열정은 그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대다수 선거운동원들의 나이는 「바이든」씨보다도 적었다. 「바이든」씨의 27세 동생인 「브루스 손더스」 부인은 그의 선거운동 관리자였다. 「윌밍턴」의 주식 중개인인 남편 「손더스」씨는 예산 관리자였다. 「델라웨어 대학교」와 「시라큐스 대학교」의 동창이자 친구인 「로저 해리슨」씨는 광고 관리자로 일하였다.
지난 1972년 8월 까지만 하더라도,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씨는 「보그스」 상원의원에 비해 47 대 19로 뒤쳐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보그스」 의원이 「워싱턴」에서 바쁘게 지내면서 「바이든」의 밀착형 선거운동이 성과를 거두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 같은 날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와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대선 결과와 반대로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사수했다. 특이점은 조 바이든이 이날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의원 보그스를 꺾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9. 관련 문서[편집]
- 미국/정치
- 미국 대통령
- 미국 대통령 선거
-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상기 4개의 선거는 1972년 대선과 유사하게 한 정당의 압승으로 끝난 선거이다.